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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우리 고장의 땅이름 유래 알아보기 ..[경상북도 구미] (내공)

백이실 2010. 8. 20. 02:31
 
 
우리고장의 땅이름 유래 알아보기라서요;;
 
다른 사이트에서 찾아보아도 잘안나오더라구요;;
 
특히 '구미'지역이 말이에요;; 아시는분은 답변좀 달아주세요!!~
내공 드립니당 @_@~~ 빠른시일안에 답변좀 부탁드륍니다~..`


1.구미
 
지금의 「구미 지역」이 신라 및 고려초에는 선산에 속한 방리(坊里)였으나 그 당시 어떤 지명으로 지칭하였는지 문헌의 기록이나 구전이 전혀 없으므로 알 길이 없다.
다만 구미()라는 지명이 문헌상에 처음으로 등재된 것은 고려 성종(981~997)때 부터이다.
 
즉 고려사 병지 역참조에 의하면 "상주도당의 25개역중에 구미(선주)가 있음을 보아" 고려성종14년(995) 선주자사를 파견할 때 관아 및 역참을 지금의 구미시 선기동에 함께 설치한 것이 고증된다.
 
그 후 조선조에 이르러 단종2년(1454)에 간행한「세종실록지리지」의 역참조에「구미역」이 기록되어 있고, 그 뒤 23년후인 성종8년(1477) 9월 선산도호부사 김종직이 편찬한 「일선지」에 의하면 선산도호부 관할의 남면 방리조에 구미리(재선산부남  삼십리) 및 전야조에 구미평(재구미촌전지)과 고적조( 선주)에 고아 및 사창, 관청, 향교 등의 구기가 남면「구미」에 있다는 등의 기록을 보아 조선초기부터 구미라는 리명이 역명과 함께 명칭되어 왔다.
 
또한 중종25년(1530) 왕명에 의하여 간행된「신증동국여지승람」의 선산도호부, 사묘조에「길재사」는 금오산 밑의「구미리」에 있는데 관찰사 남재의 소건(所建)이라 하였고, 그후 영조36년(1760)에 간행된「여지도서」의 「금오진 선산도호부」단묘조에 역시 "길재사는 금오산하의「구미리」에 있다고 하였으니" 길재사당이 금오산 아래의 「구미리」에 소재하고 있었음을 분명히 말해주고 있다.
 
그 후 조선중기에 이르러 선산도호부 관할이던 남면의 명칭이 개정되었는데 즉, 확기문헌으로 전기한 영조조에 간행된 「여지도서」의 선산부 방리조(坊里條)에 의하면 남면이 상구미방과 하구미방으로 분할 개칭되고, 뒤에 상구미는 23개리, 하구미는 14개리로 개편 증설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때 「구미리」라는 동리 명칭이 바뀌게 되었다.



"미"의 글자에 대하여

「구미」의 미자는 본래 우리나라에서 만든 이두 글자로 음은「며」이다.
또한 며와 彌(미)가 거의 동음인 것으로 모두 ‘동음이자’로 보아야 한다고 사학자인 이병도박사는 고증하고 있다.
 
이두는 한자의 음이나 새김을 빌어 우리말을 표기하는 방법을 총칭하는 것으로 인명, 지명, 관직명 등에 보이는데 신라, 고려, 조선조 초기까지 사용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구미의 지명은 이두문자임으로 뜻이 없기 때문에 음이 같은 「뜻」이 있는 글자인「구」자와 「미」자로 바뀌었다고 사학자인 이병도박사 및 불교학자인 이인재(한학 및 이두문에 조예가 깊음) 역시 고증해 주었다.


송산리
송산은 정송과 명산마을을 합하여 송산이라 칭하였으며 송산에는 용솟음산이라는 곳이 있는데 용이 솟은 흔적이 3m정도 깊이의 분화구 모양의 흔적이 있어 이산을 용솟음산이라 칭하고 정실(正室)이라는 곳에 옷샘이 있었는데 깊이가 명주실 한 타래를 풀어도 알 수 없으며 약효과 매우 좋았으며 전국에서 피부병 환자가 모여 이 옷샘 어귀의 부자집에서 매일 손님치례를 하였는데 하루는 부자집 말이 빠져 죽으니 부자집에서 옷샘을 메우고 손님을 받지 않고부터는 부자집이 망했다는 전설이 있다.
현재 정실마을에서 백현으로 가는 임도가 개설되어 있다.


 
2.백현리
 
백현리는 백이실, 넉바우, 곰재, 장산곡, 붓들 등 자연부락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백현에는 동현사와 환희사,그리고 대원사라는 사찰이 있다.
 


3.인덕리
 
인덕리는 문수, 용인, 기복, 헌덕을 합하여 인덕리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개칭되었는데, 인덕에는 농부 김기연(金起年)이 밭을 갈 때 호랑이가 나와 주인을 해치려하니 소가 주인을 구하기 위하여 호랑이와 싸워 호랑이를 죽이고 주인을 구하였으나 후에 주인이 죽으니 소도 함께 죽어 이를 가상히 여겨 1629년에 선산부사(善山府使) 조찬한이 소의 무덤에 의우패를 세우고 그 뜻을 기린 의우총이 있다
현재 문수지 옆에는 경운대학교가 자리하고 있다.


 
4.임천리
 
옛날에 몽대방으로 칭할 때 중심지로 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산동면으로 개칭되었으며 임천(林泉)은 많은 군자가 벼슬을 버리고 한거임천(閑居林泉)이라는 뜻을 따서 임천이라 칭하였다.
임천은 몽대, 새터, 부치뱅이, 승지, 학사, 갱변의 자연부락으로 구성되어있다.


 
5.봉산리
 
봉산리는 사창, 봉림, 오산, 조사실이라는 자연부락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사창은 조선조 말엽에 사직창고가 있었다는 유래와 옛날에 뒷산이 우거져 봉이 깃들인다고 해서 봉림이라 칭하고 봉이 내려와 앉은 자리를 봉루암이라 부르고 있으며 봉산 송림골에는 말 무덤이 있는데 곽재우 홍의장군 용마의 무덤이라 전하고 있다.
 
현재 봉산1리 바로 옆에는 국가산업단지(제4단지)가 있으며 봉산2리는 여기에 편입되어 없어졌다
 


6.신당리
 
신당리는 본래 원당, 반월리, 복래동, 우항, 신기, 감말의 자연부락이 있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신당리로 개칭되었다.
신당은 과거 구미와 통하는 길목으로 영남지방에서 과거를 보러 가는 선비들이 이곳을 반드시 거쳐서 간다고 하여 서울나들이라 칭하기도 하였다.
 


7.성수리
 
성수리는 용수(龍水)와 수성(水星)의 2개 자연부락이였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성수리로 개칭되었으며 이곳에는 용샘이라는 샘이 있는데 이 샘의 물은 낙동강의 물과 같아서 이 샘물이 흐릴 때는 낙동강의 물이 흐리고 맑을 때에는 강물도 신기하게 맑아진다고 하며, 홍의 곽재우장군이 이곳 용샘에서 나온 천마를 타고 명나라 천자가 주는 홍의를 입고 왜적을 토벌하였다는 무용담이 전하고 있다.

 
8.적림리
 
적림은 산동면의 면소재지로 1922년에 국도가 나면서 면사무소가 동곡에서 국도 주변인 적림으로 옮겨옴에 따라 국도를 좌우로 면사무소, 파출소, 농협, 우체국 등 각 기관이 위치하게 되었으며, 1966년에 5일장이 개설되어 매주 3일, 8일에 시장이 형성되었으나 지금은 없다.
 


9.도중리
 
도중리는 도리미, 아랫도리미, 탑마, 윗도리미로 자연부락이 구성되어 있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도임(道林)과 중평(中坪)의 글자를 모아 도중으로 호칭하였으며 이곳에는 경주인 최필영(崔必英)의 지극한 효행을 기리는 효자각이 있다.
 


10.동곡리
 
본래 몽대면의 소재지였으나 1919년 국도가 신설됨에 따라 면사무소가 적림리로 옮겨져 마지막 읍이라하여 말읍이라고도 하며, 새마, 마상골, 오리골, 지리실로 자연부락이 나누어져 있으며 문화재로는 통일신라시대 작품으로 추정되는 석탑2구를 비롯하여 큰 절터가 남아있다. 또한 산동농공단지가 이곳에 입지하여 14개 업체가 가동 중이다.
 
11.내예리

 
고려때 김해김씨가 처음으로 세거하였고, 조선초 초기에 한산이씨가 이주하였으며, 임진왜란 당시 충청도에서 경주정씨가 이주하였다. 옛날 이곳에 큰 연못이 있었는데 그 연못에는 연꽃이 많이 피고, 연뿌리가 많이 생산된다고 하여 연흥이라고도 한다.
 
12.외예리
 
고려시대는 선산(일선)김씨가 세거(世居)하였고, 조선조 초기에 파평윤씨가 도세골에 거주하였으며 임진왜란때 선산읍 내고리에서 예천임씨가 이거하여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새의 주머니와 같이 생겼다고 해서 "새낭골"이라 하기도 하고, 분가한 사람들이 새로운 터전을 찾아서 이주하였다고 하여 "새터"라고도 한다.
 


ㅋㅋ 알긴 알지만 내가 구미에 살고있지 ..그런데 내공은 무슨 내공에 1도 안보이네


출처 : 개리샌들링
글쓴이 : 조윤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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